장 미쉘 바스키아 생애와 작품세계 (왕관, 해골, 그리고 앤디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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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피카소, 비운의 천재, 현대미술의 악동 장 미셸 바스키아

    길거리로부터 캔버스까지 낙서를 휘갈긴 듯한 정리되지 않은 선과 강하고 분명한 색, 27이란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무려 2500여 점에 달하는 작품들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아티스트, 바스키아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화가입니다.

    독창적인 바스키아의 작품 속에선 특유의 상징과 기호들을 항상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스키아는 왜 이런 상징들을 그려 넣었을까요? 

    바스키아 작품 장착은 마치 힙합 뮤지션들과 작곡처럼 느껴졌는데요. 끊임없이 작품의 소재를 찾고 만들어 자신만의 소스를 만들었고 이전 작품에서 자신이 참고했던 것 그렸던 것들을 재활용해 다시 새 이미지와 결합시켜 새로운 작품을 창조했습니다. 일종의 리믹스 개념과도 비슷한데요. 그러다 보니 바스키아의 작품 속엔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갖가지 기호와 단어들.. 이러한 바스키아 특유의 이미지들은 바스키아의 삶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스키아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해골입니다.

    뉴욕 브루클린의 중산층 가정에서 비교적 평화롭게 보내던 유년시절, 바스키아에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차에 치이는 사고였는데요. 이 사고로 인해서 장 미쉘 바스키아는 병원에 있게 되고 어머니는 바스키아가 심심하지 않도록 책으로 해부학 책을 줍니다. 독특하죠? 8살의 바스키아는 책 속에 그려진 인체 장기와 다양한 뼈 모양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는 전 생애에 걸쳐서 바스키아 작품의 중요한 소재가 됩니다. 바스키아는 작품 속에 해골이나 장기를 많이 그려 넣었는데요. 드로잉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해골과 장기들이 가진 특유의 토속적인 느낌을 활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죽음이라는 무거운 키워드를 다루면서도 신기하게 경쾌한 느낌이 드러나는 그림이 가능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다빈치의 인체해부도를 포함해 역사 속에 활용된 다양한 해부와 신체, 뼈 그림에 매료됩니다. 바스키아는 그 작품들을 종종 오마주 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바스키아의 작품 속에서 해부된 인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바스키아는 어렸을 때 만화도 즐겨보았습니다.

    한때는 만화가가 되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는 데요. 학교에서 틈이 날 때마다 책이나 공책에 끊임없이 만화를 그렸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후에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때도 고스란히 유지되었습니다. 바스키아의 작품 속엔 낙서와 단어들이 뒤죽박죽 섞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과 글이 혼재된 만화적인 요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작품 속엔 미국 사회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자주 적혀있었습니다.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시대에 대한 저항과 분노,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17살이 되던 해에 바스키아는 다니던 학교를 자퇴합니다. 그리곤 예술을 좋아하는 학생이 많은 대안학교를 선택합니다. 바스키아의 아버지는 학교를 자퇴하는 것을 반대해 바스키아를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이 시기에 바스키아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티셔츠와 엽서를 만들어내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중 알 디아스라는 낙서화가를 만나게 됩니다.

     

    둘은 서로의 작품 세계를 나누며 SAMO라는 크루를 만들게 됩니다.

    SAMO는 'SAme old shit'의 줄임말로 우리말로 해석하면 그게 그거 라는 흔해빠진 것을 의미합니다. 바스키아와 친구들이 세상에 내던지는 메시지였던 셈입니다. 뉴욕 소호 거리를 캔버스 삼아서 스프레이로 담벼락에 반항적인 문구와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활동하던 1970~80년대는 비주류 정서가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덕분에 반항적인 이미지였던 그들의 크루는 뉴욕 시민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탔습니다. 바스키아는 자신의 글과 그림 속에 저작권을 뜻하는 카피라이트 기호를 적어 넣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과 권위, 작품에 대한 자부심을 의미합니다. 바스키아의 작품에선 이 기호를 빼놓지 않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스키아 본인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SAMO는 오래가지 못하고 갈라서게 됩니다. 바스키아는 활동을 통해 더 유명해지기를 바랐지만 디아즈는 영원히 익명의 화가로 남고 싶어 했기 때문에 뜻이 달랐던 것입니다.

     

     

     

     


    바스키아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예술가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예술가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바로 키스 해링이나 케니 샤프 같은 팝 아티스트였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길거리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예술가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1980년에는 바스키아의 인생을 바꾼 인생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바스키아는 당대 가장 유명한 예술가인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됩니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재력과 타고난 마케팅을 바탕으로 바스키아를 금세 유명해지게 만들었습니다.

    바스키아는 덕분에 유명한 화가라는 목표에 한층 다가서게 됩니다. 세계적인 미술시장이었던 뉴욕에서 독창적인 화풍으로 바스키아는 어느덧 예술계의 스타로 자리 잡게 됩니다. 바스키아는 이 시기 인물을 담는 초상화 작품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특히나 당시 인종차별적인 사회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바스키아는 주류 예술계에 처음 등장한 흑인 예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잘 알았던 바스키아는 작품 속에 불평등한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흑인 히스패닉 영웅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재즈 아티스트, 인권운동가, 복싱 선수가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영웅들의 머리 위에 왕관을 그려 넣었습니다.

     

     

     

     


     

    왕관은 카피라이트 표시와 함께 바스키아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자신이 담는 인물에 대한 존경과 찬미의 의미였습니다. 동시에 카피라이트 표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품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바스키아는 이러한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엮어 마치 낙서 같은 작품들을 그려냈습니다. 그러면서 작품 속에 자신의 이야기, 영웅, 죽음 등을 담아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독특한 화풍에 매료되었고 1980년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유명한 화가가 꿈이었던 바스키아는 워홀을 통해 그 꿈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유명세로 인해 고통도 받게 됩니다. 언론은 바스키아와 워홀의 관계를 의심하고 좋지 않은 소문을 퍼트리기도 합니다. 이 시기 워홀과 바스키아가 공동으로 기획했던 전시가 실패로 끝나면서 둘 사이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987년 워홀이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소식을 들은 바스키아는 아주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극심한 약물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워홀이 사망한 지 1년 뒤인 1988년 바스키아는 약물중독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바스키아의 작품을 순수함을 담은 폭력, 죽음을 담은 생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바스키아가 작품 속에 남긴 다양한 기호들은 그러한 고민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삶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바스키아만의 유머러스한 화풍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바스키아가 남긴 수많은 상징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패션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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